“1994년 김영삼 대통령 때였습니다. 당시 대통령께선 현대중공업 파업이 장기화되는 것을 보고 경찰력을 투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직접 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안 됩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평화롭게 수습하겠습니다.”
남재희(89) 전(前) 노동부 장관이 자신의 삶을 정리한 회고록 ‘시대의 조정자’(민음사)를 펴냈다.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그는 한국일보 기자, 조선일보 문화부장·정치부장·논설위원, 서울신문 주필을 거쳤다. 이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서울 강서구에서만 4선을 했고, 김영삼 정부 시기엔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정치 인생에서 그는 줄곧 보수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진영을 아우르는 행보를 보여왔던 한국 정치의 원로로 꼽힌다.
책엔 ‘조정자’로서 여러 정치 현안을 풀어내는 과정의 고민이 담겨있다. 그는 김영삼 정부의 노동부 장관으로서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공권력 사용을 자제하며 현대중공업 노사의 타협을 이끌었고, 노태우 정부의 인수위원회 격인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화위)에선 국민 통합 분과를 맡아 그 전까지 ‘폭동’으로 정의됐던 1980년 5월의 광주를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명명했다. 그는 대학 시절 조봉암과 대화를 나눈 것을 시작으로 진보 인사들과도 교류해 왔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체제 내 리버럴’.
남 전 장관은 현재 정치가 정책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영 간 이견이 좁혀진 시기라고 평가했다. “정의당을 보면 이제 진보 진영에서도 보수 정당과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인 정책들을 내놓고 있어요. 민주노동당 때와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과 협상은 더욱 어려워진 현실을 지적했다. “정치에서 다툼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재 여야엔 모두 문제가 있죠. 여당은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뽑는 데 직접 관여하는 듯하고, 덕치(德治) 대신 법전에 따른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문젭니다. 야당은 대표가 자신의 의혹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지금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요. 그 의혹에 대한 ‘청결 작업’을 하는 것이 야당의 숙제입니다.”